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문단 편집) ==== 정계 복귀와 내전기 ==== 로마로 복귀한 키케로는 전성기의 위세를 되찾기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카이사르와의 동맹 관계를 청산하고 자신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것을 종용하나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딸)|율리아]]와 화목한 가정을 꾸린 데다 클로디우스에 의해 정치적으로 몰락한 키케로보다는 집정관 재임기 삼두의 행동대장격으로 혁혁한 성과를 올리며 자신의 유용함을 십분 입증한 카이사르와 협력하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한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설득에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또한 기원전 56년, 본래부터 관계가 험악했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붕괴 직전에 다다랐던 삼두의 협력 체제가 카이사르의 개입으로 다시 공고해져 [[소 카토]]를 위시한 옵티마테스의 공세마저 이겨내자, 카이사르의 압력에서 벗어날 호기라는 판단에서 카이사르에 대한 공세에 나섰던 키케로는 역으로 삼두의 압력에 굴해 그해 여름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는 굴욕에 가까운 일을 겪는다. 일이 마무리되자 자신이 직면한 현 상황에 낙담한 키케로는 정계에서 벗어나 저술 활동에 전념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부인인 율리아가 요절하고 파르티아 원정에 나선 크라수스가 카르헤에서 패사하면서 둘의 사이를 중재할 존재가 사라지자 갈리아에서 엄청난 군공을 거두며 로마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한 카이사르와 그의 부상을 경계하는 폼페이우스 사이엔 차츰 긴장이 감돌게 되고, 그에 따라 키케로 역시 서서히 카이사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한편[* 폼페이우스 입장에서 갈리아 속주 총독 재임기 초반 무렵까지 대체적으로 자신에게 유용한 존재이자 눈에 띄는 정치가 이상은 아니었던 카이사르가 갈리아 속주 총독 재임기를 통해 자신과 비견되는 위상을 지닌 인물로 발돋움한 사실과][* 카이사르가 갈리아 속주 총독 임기 마지막해 두 번째 집정관직 선출에 도전하리라는 것은 당시 로마 정계에서 상식으로 통했으며 그렇다면 카이사르의 당선 역시 상식에 준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카이사르를 견제할 목적으로 폼페이우스가 신설한 향후 집정관과 법무관은 임기를 마치고 5년이 지나야만 속주 총독으로 부임이 가능하다는 규정은 당장 속주 총독으로 부임할 인사가 부족해지는 사태를 초래했고, 그 결과 과거 집정관 임기 이후 속주 총독직을 거절했던 키케로는 뜬금없이 킬리키아 속주 총독직을 떠맡는 날벼락을 맞게 된다. 총독 임기 자체는 성공적이었고, 소소하게나마 군사적 업적도 거둠으로써 개선식을 허락받는 등 조금씩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얼마 후 속주 총독으로서의 임기가 종료되는 카이사르의 향후 지위를 쟁점으로 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의 갈등이라는 더 큰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이 시기 대다수 의원은 내전만은 피하길 원했고 카이사르도 합의를 위한 시도가 좌절돼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기로 마음먹기 전까진 군사적 충돌만은 피하려 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를 지지하여 일종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던 호민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본래 대표적인 반 카이사르 인사로 명성을 떨쳤으나, 이 무렵엔 카이사르 지지자로 선회한 상태였다.]가 원로원에 제안한 관대한 조건의 타협안은 표결에 부쳐져 찬성 370에 반대 22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얼마 후 속주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개선식을 기다리며 로마 외곽에 자리 잡은 키케로도 양자의 타협을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원로원 내 소수 강경파[* 사실상 카이사르의 부상을 경계하던 폼페이우스와 카토를 위시한 옵티마테스]에 의해 이러한 시도는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정 장악력을 증명 혹은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카이사르의 전면적 항복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카이사르를 기다리고 있는 처분은 최소한 사실상의 정치적 사형 선고였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내전|마침내 옵티마테스의 주도하에 카이사르를 표적으로 한 원로원 최종 결의가 가결되나 이에 불복한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을 넘으면서 내전이 발발하자]], 키케로는 여러 날에 걸쳐 어느 쪽에 가담할지 고민한다. 그는 숙고 끝에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 세력에 가담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는 카틸리나 탄핵에서 대립한 이후 여러 차례 충돌하며 악화한 카이사르와의 관계, 전부터 카이사르파 인사들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것, 폼페이우스와의 우호 관계 및 어찌 됐건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 일파가 공식 정부로서 정통성을 지녔다고 여긴 것 등의 복합적인 이유에서 내려진 결정일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대신 한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며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으며, 카이사르의 회유에도 응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에 앞서 후방을 정리하기 위해 현재의 스페인인 히스파니아로 향한 카이사르의 패전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로소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진영으로 향한다. 반면 키케로의 사위인 돌라벨라는 전부터 열렬한 카이사르 지지자로 유명했고 이 시기에도 당연히 카이사르 휘하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폼페이우스가 "당신 사위는 어디 있소?"라고 비꼬자 키케로는 "당신 장인과 함께 있소"라는 대답으로 맞받아쳤다.[* 상술했듯이 폼페이우스는 한때 카이사르의 사위였다.] 그러나 키케로에게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머문 나날은 암울함의 연속이었다. 우선 카토는 이탈리아에 남아 카이사르의 걸림돌 역할을 하는 대신 그리스로 건너온 그를 비난했고[* 키케로와 카토는 대개 공화정의 수호자로 한데 묶이곤 하나, 정작 살아생전 두 사람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그 무렵 옵티마테스의 리더격이었던 카토는 신참자인 키케로를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고, 그러자 자연스레 카토를 보는 키케로의 시선도 곱지 못했다. 이런 관계는 훗날 카토가 자결해 공화정의 순교자로 추앙받기 전까지 계속된다.], 그는 그대로 작금의 상황에 불만을 품어 자꾸 초를 치는듯한 발언을 일삼은 탓에 폼페이우스의 진영에서 인기가 없었다. 또한 과거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하며 우호 관계를 구축한 그의 아우 퀸투스는 심정적으로 카이사르파였으나 형과의 의리 때문에 마지못해 동행한 처지였으므로 형제 사이에도 암운이 감돌게 된다.[* 더구나 키케로는 동생에게 고압적으로 구는 면이 없잖았기에 이전부터 은근히 동생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그렇게 우울한 날이 이어지는 중, 후방에 남아있던 키케로에게 [[파르살루스 회전|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와 격돌한 폼페이우스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로써 내전의 승자가 카이사르임이 대략 판가름 났으나, 후방에 남아있던 옵티마테스 인사들은 카토의 주도하에 파르살루스에서 패주한 인사들을 받아들이고 남은 이중 가장 높은 직책을 역임했던 키케로를 신임 사령관으로 지목[* 당연하지만 바지사장 격의 위치였다.]하는 등 저항을 이어갈 의지를 다진다. 그러나 키케로는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에 분개한 이들이 칼을 뽑아 들고 목숨을 위협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소란 끝에 군영에서 사실상 추방된다. 설상가상 심정적으로 카이사르파였던 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제 깨져버린 카이사르와의 우호 관계를 이유로 형을 비난하면서 형제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런 상황에 질려버린 키케로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친구인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 중립에 가까웠으나 굳이 고르자면 카이사르에게 우호적이었다.]에게 '내가 당시 저지른 일에 대해 내 자신도 믿을 수 없네. 내 정신이 잠깐 이상해졌던 모양이야'라는 편지를 쓰며 자신을 질책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내전 발발 직후부터 [[대인배]]를 표방하여 자신과 대립한 인물을 처벌하지 않았다. 이후 집권해서도 관용(클레멘티아)이란 말을 화폐에 새길 정도로 관대함을 표했던 카이사르는[* 이에 비해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에 취임하면서 내건 구호는 평화(팍스)였다. 미묘한 차이.][* 이 관용에 대해 키케로는 당신의 관용이 많은 생명을 구한다(clementia tua multas vitas conservat)라고 칭찬했는데, 드라마 [[추노]]의 오프닝 곡 '바꿔'의 첫 가사로도 쓰였다.] 승자로서 로마로 귀환하던 중 환영인파 속에서 키케로를 발견하자 불러내 말머리를 나란히 함으로써 그를 대우하고, 이후에도 키케로가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를 지지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키케로를 과거 자신에게 맞섰던 이들과 소통하는 창구로 삼고 친교를 다지기 위해 그의 별장을 방문하는 등 그를 우대한다.[* 그러나 정작 카이사르를 접대해야 했던 키케로는 "카이사르 자체는 참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를 대접하는 일은 골치 아프니까 앞으로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뉘앙스의 불만을 토로한다.][* 이 만남에 대한 카이사르의 반응은 "그(키케로)가 나를 극도로 미워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키케로도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패전 인사들에 대한 사면을 이끌어 내는 등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편 내전의 승자 카이사르는 명실상부 유일무이한 최고권력자가 됐으나 제정 수립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진 않았기에 공화정 존속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이전까지 카이사르는 나름 헌법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키케로는 지금껏 카이사르가 보여준 모습에 기반해 술라처럼 독재관을 역임해 현재 로마가 당면한 혼란을 수습하고 공화정을 존속시키리라 기대했다. 당시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유지하리라 생각했으며 이런 입장을 보이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